<출처> 2012년 4월 17일 경향신문
[시론] 쌍용차 23번째 죽음을 막으려면
이도흠 | 한양대 교수·민교협 의장
온갖 꽃이 흐드러져 아름답다. 그 절정의 순간, 낙화의 슬픔을 떠올리는 것이 또 인간의 마음이다. 모든 이들이 불멸을 꿈꾼다. 하지만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지옥으로 변했을 것이다. 어떤 이가 병원에서 의사로부터 암진단을 받아 석 달밖에 살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케 세라, 세라!(될 대로 되라)”라고 외치며 흥청망청 살겠는가.
호스피스들의 증언에 의하면,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이들의 태도는 비슷하다고 한다. 처음엔 죽음을 부정하고 분노하지만, 어느덧 체념하고 그 이후엔 “어떻게 하면 남은 날을 의미로 채울까, 어찌하면 사랑하는 이에게 조금이라도 더 베풀고 갈까?”를 고민하며, 1분 1초를 아껴, 최선을 다해 생에 임한다고 한다.
그러기에 죽음에 다가갈수록 외려 삶은 의미로 반짝인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범인들도 죽음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을 인식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실존적 성찰을 한다. 그러기에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의 본질이 바로 ‘죽음으로 가는 존재(Sein zum Tode)’라고 명명했다. 결국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지 않고 인간이 실존하려면, 죽음을 통해 성찰해야 하는데, 그 죽음이란 늘 타인의 죽음이다.
또 한 명의 쌍용자동차 노동자가 투신 자살했다. 벌써 22명의 노동자가 희망의 빛을 잃고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 그럼에도 세상은 고요하다. 사람들은 관심조차 없다. 덕수궁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설치하던 날, 경찰이 이를 제지하자 송경동 시인이 다급하게 도움을 청하는 전화를 했다. 겨우 몇 명이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을사람이 모두 모여 관혼상제를 함께 하던 우리나라가 어찌하여 죽은 자를 추모하는 분향소조차 설치하지 못하고 당사자만이 슬퍼하는 나라가 되었는가. 한 명도 아니고 스물 두 명이 똑같은 사유로 죽었는데, 그에 통곡하고 분노하고 성찰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이미 죽은 사회다.
국가와 자본은 이들에게 물리적 폭력, 구조적 폭력, 문화적 폭력, 재현의 폭력 등 모든 폭력을 감행했다. 쌍용자동차는 부실경영에서 빚어진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하여 2646명을 대량 해고했다. 정권은 헬기와 경찰특공대를 동원해 전쟁을 방불케 하는 살인 진압작전을 펼쳐 파업 노동자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더니, 이것으로도 모자라 수십억원의 손배·가압류를 청구했다.
신자유주의제도와 비정규직법은 이들이 다른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길을 봉쇄하고 ‘피할 수 있는 모독’을 가했다. 사회는 정리해고 철폐를 사회주의적 발상이라 매도했으며, 보수언론은 이들을 과격 폭력 분자로 재현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기에 이들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며, 그 1차적 책임은 국가와 자본에 있다.
우리 또한 이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삶이 아무리 곤고해도 기댈 언덕 하나만 있어도 살아갈 기운을 내고, 아무리 절망이 깊어도 어두운 하늘에 별 하나만 반짝여도 지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데, 우리는 기댈 언덕도, 별도 되지 못했다. 하지만 길은 절망의 막다른 곳에서 열리고, 진정으로 맑은 새하늘은 죽은 자의 무덤 위에서 열린다.
2011년, 신자유주의 체제에 주눅이 들었던 99%가 저항했다. 그렇다면, 2012년은 새로운 길을 내는 해가 되어야 하리라. 멀리로는 신자유주의를 해체하는 길을 트자. 그렇게 되려면 무엇보다도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이 결합해 정권과 자본에 맞설 수 있는 권력을 가져야 하며, 노동조합 또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 이것은 지난한 싸움이 될 것이다. 당장 23번째의 죽음을 막으려면 현 상황에서 가능한 대안은 무엇일까.
우선 추모대회에 참여해 죽음의 의미를 성찰하고, 모금이든 벽돌 한 장을 나르든 모두가 하나가 되어 ‘희망공장’을 세워보자. 그곳에서 해고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어 ‘진정한 자기실현’으로서 노동을 하고, 서로 공동으로 생산하고 분배하자. 죽었던 언덕에 꽃들이 하나 둘 피어나듯 ‘희망공장’의 꽃을 여기저기 피우다 보면 그 언덕이 바로 우리가 그리던 그곳, ‘노나메기’가 되지 않겠는가.